내가 구석기를 좋아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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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022.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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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용(전곡선사박물관 관장)
살면서 가장 기분 좋을 때가 언제인지를 물어보는 설문조사에 많은 사람이 여행 가방을 꾸리는 일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복잡한 일상을 떠나 여행을 떠난다는 것?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내가 구석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구석기시대가 바로 이 여행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두 발로 일어선 이후 우리는 끊임없는 여행을 했다. 아프리카를 벗어나,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넜다. 뜨거운 사막도 인류의 위대한 발걸음을 막지는 못했다. 저 산 너머, 저 바다 건너 무엇이 있을까? 미지의 세계를 향한 끊임없는 호기심과 도전은 인류의 여행 본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구석기시대 최고의 발명품은 주먹도끼다. 주먹도끼는 인류가 진화의 여정을 떠날 수 있게 해준 도구다. 적어도 250만 년 전 최초의 석기를 만들어낸 인류는 거의 100만 년이 지나서 주먹도끼라는 신박한 도구를 만들어 냈다. 주먹도끼를 만들기 위해서는 주먹도끼의 최종 모양을 설계도의 형태로 완벽히 머릿속에 입력할 수 있어야만 했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주먹도끼를 상상으로 그려낼 수 있는 능력 즉 “생각의 힘”이 주먹도끼를 만들 수 있게 해주었다. 주먹도끼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추상적 사고능력은 물론 미래 예측과 의사소통 등 한 차원 높은 지적 능력이 필요했다.
주먹도끼는 구석기시대의 만능도구다. 주먹도끼는 100만 년 이상 사용되었던 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 도구다. 또한 주먹도끼는 인류 생존을 위한 도구 이상의 도구다. 만능도구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그 형태마저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구를 아름답게 만들려는 노력과 예술적 사고의 출발점 역시 주먹도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놀라운 도구, 주먹도끼를 만들 수 있었던 능력을 갖춘 호모 에렉투스는 마침내 멀고도 긴 지구 여행길을 떠날 수 있었다. 아프리카를 떠나 미지의 신세계를 향하는 호모 에렉투스의 손에는 주먹도끼가 들려 있었을 것이다. 마치 지금 여행을 떠나는 우리가 스마트폰을 꼭 쥐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주먹도끼를 사랑하고 구석기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