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곡서가 : 우리들의 화려한 성장 일기, <우리가 처음 사피엔스였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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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
2025.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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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스토리텔러
김상태(국립나주박물관장)
1.
우리는 대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지냅니다. 물론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인간이 여타 존재들에 비해서 월등히, 그것도 아주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강해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대자연과 ‘함께 살아간다’기 보다 ‘지배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쉬운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습니다. 지금 인간은 지구 생태계의 최상위 지배종이니까요.
우리가 지배종으로 성장해 온 과정은 그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왜냐하면 자연계에서 피지배종이 지배종으로 탈바꿈한 사례는 ‘대멸종’과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불가능한 까닭입니다. 모든 생물종은 예외없이 신체 진화를 통해 동시에 적응하고 경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외적으로 인간 성장의 배경에는 다른 동물들이 갖고 있지 않은, 신체 이외의 진화 요소가 추가로 있었습니다. 바로 ‘도구’입니다. 맹수의 송곳니와 발톱, 북극곰의 따스한 털, 독수리의 힘찬 날개 등, 포식자들이 수십수만 년에 걸친 신체 진화를 통해 어렵사리 획득한 것을 인간은 순식간에 도구로 만들어 자신에게 장착할 수 있습니다. 진화를 통해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최강 도구, ‘불’까지 손에 넣었습니다. 이 도구들이야말로 인간이 피식자에서 포식자로 화려하게 재탄생할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초기 인간 도구 발달의 전반적인 스토리는 『단단한 고고학』(김상태, 2023, 사계절)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 저의 또 다른 책 『우리가 처음 사피엔스였을 때-예술과 기술의 기원을 찾아서-』(김상태, 2025, 사계절)에서는 도구 발달사에서 맞이한 첫 번째 특이점을 예술을 주제로 집중 조명해 보았습니다. 호모 사피엔스 출현 이후의 도구들은 정신적 영역에 대한 각성과 함께 새로운 차원의 도구 개발, 그리고 그것을 통한 활동 영역의 드라마틱한 확장 등이 핵심 스토리입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연계에서 확실히 차별적 존재로 성장했고, 마침내 새로운 지배종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2.
호모 사피엔스들의 도구 세계에는 이전과는 차별화된 새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장신구입니다. 고고학자들이 장신구에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개인의 소유물이기도 하지만,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이중성 때문입니다. 신체를 장식하는 것 자체가 이미 타인을 의식한 행위이고, 따라서 장신구가 등장하는 것은 타인과 구분된 자신만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장신구는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인 신체를 사회적 도구로 전환시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먹을 것을 위한 도구가 아닌, 세상과의 소통을 위한 최초의 도구가 탄생한 것입니다. 삶의 공간을 넘어 심지어 사후세계로까지 확장된 장신구의 존재를 통해 호모 사피엔스들의 정신세계를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흙과 돌을 정제해 다양한 색깔의 안료를 만들고<그림 1> 그것으로 거대한 동굴벽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 역시 인간 정신세계에 모종의 큰 변화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한 줄기 빛조차 없는 깊은 동굴 속에서 어스름한 기름등잔에 의지한 채 그려진, 벽면 가득한 호모 사피엔스의 벽화들은 그들의 상상 속 신화였고, 모두 함께 공동체의 의식을 다지고 영속을 기원하던 영적 공간을 꾸미는 장식이었을 것입니다. 영속이라는 어리석은 기원은 첨단 과학 기술이 지배하는 현대 문명 사회에서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원시인인 그들과 문명인인 우리는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막연히 그들의 원시적 삶이 고단했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벽화, 조각 장식, 악기와 장신구들은 그들이 현대인 못지않게 정교하고 화려한 정신세계와 풍요로움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구석기시대 동굴벽화에 사용된 안료 덩어리(프랑스 라스코동굴)
한편 그들은 새로운 도구를 통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냅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개척한 것은 과거 호모 에렉투스가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과 아시아에까지 도달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입니다. ‘더 넓은 땅’과 같은 2차원적 확장이 아니라, 호수나 바다와 같은 새로운 공간으로의 3차원적 확장을 이루어 냅니다. 호모 사피엔스들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을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깊은 바닷속에 낚시를 드리우고 물속의 사냥감들까지 모두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지적 성장과 도구의 개발, 즉 신체 진화와 기술의 진보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혁신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구석기시대 말, 도구의 발달과 그에 따른 삶의 방식 변화가 정점에 이른 어느 날, 인류는 경제사적 측면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이스라엘 갈릴리호수 근처의 초기 원시 농경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오할로2 유적에는 인간에 의해 길들여지기 시작한 원시 밀과 빵을 굽던 오븐이 잘 남아 있습니다. 약 2만 3천 년 전 무렵, 오할로의 사람들은 더 이상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산과 들을 헤매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저 아침에 일어나 집 앞 마당에 자라고 있는 곡식을 조금 수확하고, 그것을 갈아 빵을 구우면 풍족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700만 년 동안 유지되어 오던 오랜 채집 경제가 생산 경제로 전환되는 극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인간이 흡사 식물처럼 스스로의 에너지를 만들어냄으로써 마침내 ‘탈먹이사슬’을 이루어 낸 것입니다.
탈먹이사슬과 함께 시작된 또 하나의 특이 현상은 ‘집단의 거대화’입니다. 자연계의 먹이사슬에서는 상위 종일수록 개체수가 적어지고 집단의 규모 역시 작아집니다. 이것은 생태계의 자연스러운 질서이고 균형입니다. 그런데 호모 사피엔스의 집단은 최상의 포식자임에도 점점 거대화되어 갔습니다. 스스로 먹을 것을 생산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울러 거대해진 집단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에는 앞서 열거한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도구와 행위들을 병행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것은 의식주와 관련된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가능한 것들입니다. 예컨대 장신구와 조각품을 만들어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안료를 정제해 동굴벽화를 그리고, 그 안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다 함께 영적인 행위를 하는 것 등입니다. 몇만 년 전부터 우리는 이렇게 의식주와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정신적 활동들을 해 왔습니다. 이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오할로 2 유적의 추정 오븐
3.
다양한 분야의 연구 결과는 호모 에렉투스 단계에서 인간은 이미 최상위 포식자가 되었고, 이후 지속된 지적 진화와 도구 발달은 점차 초월적 지위에 이르는 과정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후기 구석기시대 호모 사피엔스들의 손에 의해 꽃 피운 원시 예술과 상징 등의 정신문화, 어로와 농경 등의 새로운 물질문화는 ‘문화와 문명 V.1.0’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 문명의 원형질입니다.
지금 인간은 태양계를 넘어, 또 하나의 거대한 세계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새롭지 않은, 지극히 우리다운 모습입니다. 끊임없는 도전과 성취는 호모 사피엔스의 본질이니까요. 인류의 예술과 기술의 기원을 탐색하는 『우리가 처음 사피엔스였을 때』를 통해 우리가 걸어 온 길의 진면목을 찬찬히 확인하며, 우리 자신을 한층 더 깊이 이해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김상태 지음, <우리가 처음 사피엔스였을 때 -예술과 기술의 기원을 찾아->, 2025, 사계절
김상태 지음, <단단한 고고학 -돌과 뼈로 읽는 인간의 역사->, 2023, 사계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