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땅이 기억하는 인류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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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
202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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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일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고고학은 인류가 남긴 물질적 자료를 통해 그들의 행위를 복원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여기서 물질적 자료란 과거에 살았던 사람이 사용하고 남겼던 흔적을 말한다. 선사시대에는 석기나 토기가 이에 해당하며, 21세기의 현대라면 휴대폰이나 노트북은 물론 각종 생활쓰레기들 역시 고고학의 물질적 자료가 될 수 있다.
물질적 자료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땅속(육상고고학)이나 물속(수중고고학)에 숨겨져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를 드러내고 노출시키는 과정이 고고학 학문의 영역이자 핵심이다. 그러나 단순히 물질적 자료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숨겨지게 되는 과정을 규명하는 연구 또한 고고학의 중요한 영역이다. 이러한 연구 주제는 1970년대 행동고고학(Behavioral Archaeology)에서부터 기초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으며, 유물과 유적지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형성 과정을 거치며 변형된다는 개념으로 정립되었다.
인류가 남긴 물질적 자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구석기시대의 석기이다. 구석기시대의 석기를 인류가 최초로 사용한 도구인지 여부는 확실치 않으나, 사용했던 도구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되어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큰 것은 분명하다. 이 때문에 남아 있는 구석기 유물은 석기가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석기 역시 부식되거나 마모될 수도 있다. 고고학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물이나 바람, 화학, 물질적인 산화작용 등을 통해 변형되거나 약화된 석기들을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한 석기 자체는 아니더라도 동물이나 식물, 곤충 등의 생물 활동에 의한 교란도 물질적 자료를 교란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석기가 발견된 자리 역시 구석기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우리는 석기가 출토된 자리를 ‘구석기 유적’이라 부르지만, 이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석기가 출토된 층위와 입지 조건을 면밀히 살펴야 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석기가 발견된 층위는 그것이 사용된 시기를 특정하는 단서가 되며, 입지 조건은 당시 인류가 살았던 환경을 유추하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구석기 유물은 사용 당시의 퇴적층에 발견되기도 하지만, 더 후대에 형성된 층위에서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즉, 석기의 사용, 폐기 시기와 출토 층위의 시기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구석기 유적은 대체로 하천 주변의 낮은 구릉지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가장 흔한데, 이는 원시 인류의 생활 환경으로 가장 적합한 장소에 부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입지적 특성으로 인해 하천의 흐름에 따라 지형이 교란되거나 매몰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 때문에 해당 층위의 형성 및 변형 과정을 구분하고 해석하는 것은 고고학자에게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석기가 출토된 층위 자체를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층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복잡한 변화를 파악하며, 그것이 석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로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고고학자에게 보다 넓은 시각과 학문적 통찰을 요구한다.
결국 구석기 연구에서 석기 자체를 분석하는 전통적인 방법이 가장 중요한 영역으로 간주되지만, 석기가 출토된 자리와 그 형성 과정을 탐구하는 것 역시 중요한 연구 주제이다. 땅속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인류의 흔적인 석기, 그리고 그것이 출토되기까지의 오랜 과정을 연구한다는 것은 인류의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고 해석하는 고고학의 험난하면서도 의미 있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구석기시대 유적은 퇴적 양상과 석기 분포 특성에 따라 상이한 성격을 지닌다. 특히 동일한 시기·지역 내에서도 유물층의 구성, 석기 접합 비율, 그리고 분포 형태에 따라 장기간 거주 및 제작 활동을 반영하는 유적과 단기간 활동 혹은 후퇴적 과정을 거친 유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다음은 두 가지 대표적 유형을 제시하고, 그 형성 과정과 고고학적 의미를 분석한다.
A유형
여러 개의 유물층이 확인되며, 2~3개의 토양쐐기가 반복된다. 퇴적층의 시간적 범위가 큰 편이다. 대부분의 층위에서 석영, 규암제의 몸돌, 격지 석기가 주류를 이룬다. 기술적 단계 구분이 불명확하며, 이는 장기간의 거주보다는 단기간의 특정 활동이 반복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접합 석기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다. 일부 접합 석기는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확인되거나, 심지어 다른 퇴적층의 유물과 접합되기도 한다. 층위상 ‘U’자형 곡부가 나타나거나 가파른 사면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확인된다. 이는 유물의 재퇴적 과정을 강하게 시사한다. 석기는 불규칙적으로 분포하며, 지형적으로 낮은 지대에 집중되거나 열을 이루어 배열된다. 이는 활동 흔적이라기보다는 자연적 요인(수류, 중력 등)에 의해 유물이 이동·집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단기간의 활동 흔적 혹은 후퇴적 과정 등으로 인한 2차적으로 형성된 유적으로 해석된다. 석기 제작 중심지가 아니라, 사냥·야영과 같은 특정 목적 활동의 산물일 가능성도 있다.

A유형 유적의 예(청주 송절동 유적 Ⅱ-14, 구석기 3구역)
B유형
유물층은 하위층에서 상위층으로 갈수록 몸돌 석기 → 돌날 석기 → 좀돌날 석기로 발전하는 기술적 연속성이 뚜렷한 편이다. 이는 한 장소에서 장기간에 걸쳐 반복적으로 인류가 거주했음을 시사한다. 돌감의 종류가 다양해짐과 동시에 돌감의 일관된 사용이 나타나며, 접합되는 석기의 비율이 높게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해당 지점이 석기 제작의 주요 거점이었음을 보여주며, 돌감 석재 가공과 폐기의 과정이 동일 공간 내에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석기의 공간적 분포는 다소 불규칙하나, 접합 석기가 특정 구역에 밀집되어 나타난다. 이는 제작 행위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작업장(workshop)적 성격을 반영한다. 장기간 거주 및 석기 제작 중심의 생활 유적으로 이해된다. 기술 발달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점에서 구석기 연구에 있어 중요한 학술적 자료로 기능한다.

A유형은 구석기시대 이른 시기의 석영 몸돌 석기 문화의 유적에서 자주 확인되며, B유형은 구석기시대 늦은 시기의 돌날과 좀돌날 문화가 확인되는 유적에서 주로 관찰된다. 구석기시대 유적은 형성된 이후 장기간에 걸쳐 다양한 자연적·인위적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 자연적인 요인은 기후 환경과 지형 환경 등 지구 환경적인 변화를 포함하며, 지진이나 태풍, 홍수 등 일시적인 환경변화에도 영향을 받아 변형이 점차 누적된다. 특히 퇴적물의 이동, 침식, 생물 활동 등은 층위의 온전한 보존을 어렵게 만드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명의 발달에 따른 인류의 활동, 즉 인위적 요인으로 인한 유적 훼손도 점차 누적된다. 따라서 이러한 변형 가능성은 유적이 형성된 시점으로부터 시간이 길어질수록 누적적으로 증가한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의 구석기 유적일수록 변형 과정을 크게 겪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로 인해 원래의 문화층 구조나 석기 배치 양상이 왜곡되었을 개연성이 크다. 그 결과 이른 시기 구석기 유적에서는 석기의 제작 방식이나 기술적 변화상을 층위별로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례가 극히 드물다.
다만, 변형이 이루어진 유적이라 할지라도 부분적으로 보존된 구역이 있을 수 있으며, 반면 잘 보존된 형태의 유적이라 할지라도 부분적으로 변형된 경우가 있다. 따라서 구석기 유적 연구에서는 석기 자체의 기술적 특성과 지형·퇴적 환경 분석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변형 가능성을 평가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층위적 변화상을 직접적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