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식 상실의 시대
-
관리자
2023.03.21
-
- 0
프랑스 라스코 동굴에는 창을 이용해 가까운 거리에서 사냥하다 공격당한 사람과 그 창에 찔려 내장을 쏟아내는 들소 그리고 사후세계를 상징하는 새가 그려져 있다.
이한용(전곡선사박물관 관장)
영화 <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 그 첫 장면은 고병갑 역을 맡은 김희원 배우와 정승필 역을 맡은 김성오 배우가 부둣가에서 맛있게 생선회를 먹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영화의 호불호와는 상관없이 “야 너 생선 잘 먹는다..... 난 생선 안 먹는다”로 시작되는 김희원 배우가 던지는 찰진 대사는 참 인상적이다. 회를 먹을 때 눈을 뜨고 죽은 생선과 눈이 마주치면 죄책감이 느껴진다는 킬러의 고백 아닌 고백이다.
영화의 스토리를 얘기하자면 길고, 맛있게 생선회를 먹고 있지만 곧 총에 맞아 죽게 될 김성오 배우에게 던지는 김희원 배우의 대사 중에는 이런 대목도 나온다.
“그래서 난 작업할 때 눈을 못 보겠더라고 (죄의식 때문에)... 근데 죄의식이 다 이렇게 나쁜 쪽만 있는 것 같진 않더라고 그 죄의식이라는 게 작업 방식을 많이 발전시켰어. 석기시대 때는 돌로다가 사람을 찍어 죽였을 거 아니냐, 청동기 철기 때는 칼 도끼로 찌르고 때리고, 근데 요즘에는 총으로 죽이거든, 총이라는 게 죄의식을 줄여줘, 아무래도 거리가 있다 보니까“
인류의 진화에서 도구의 진화는 이 영화의 대사처럼 타인을 공격하는 무기의 진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약 150만 년 전의 석기시대 구석기인이 만든 주먹도끼는 생존을 위한 도구였지만 동시에 언제든지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무기였다. 주먹도끼로 상대방을 제압하려면 당사자도 큰 위협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무기의 발달에는 나는 최대한 안전하면서 상대방에게는 치명상을 입히는 방법 즉 유효사거리를 늘리는 게 중요한 과제였다.
약 40만 년 전에 이미 유효사거리가 10~20m 정도인 나무창이 등장한다. 석기와 비교해 볼 때 매우 안전한 사냥도구이자 무기였다. 약 2만 년 전 후기구석기 시대에 개발된 아틀아틀(창던지개)에 장착한 가늘고 긴 창은 수십 미터를 빠르고 정확하게 날아가 목표물을 명중시켰다. 이제 사냥꾼은 더욱더 안전하게 되었다. 활이 그 뒤를 이었고 마침내 킬러들의 죄의식을 줄여준다는 총이 발명되었다.
총의 사거리는 점점 길어져 이제는 총알을 맞는 상대방이 누가 쐈는지도 모르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 단추 하나만 누르면 수 백 킬로를 날아가 수많은 죽음을 만들어내는 미사일이 오늘도 죄책감 없이 우크라이나 상공을 날아다니고 있다. 우주 진출을 꿈꾸는 문명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자랑하지만, 핵탄두를 탑재한 ICBM은 지구 반대편의 서로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갈 수도 있다. 이게 다가 아니다, 상대의 눈이 안 보이는 익명의 그늘에 숨어서 가짜뉴스와 악성댓글을 쏟아내는 그야말로 죄책감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주먹도끼를 들고 일대일 대결을 펼치던 구석기시대가 차라리 죄책감이 넘치던 인간의 시대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