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구석기를 연구하며 생각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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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023.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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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일본 연구실 모습
홍혜원 (일본 오카야마 이과대학 교수)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고학을 떠올릴 때면 아마도 이집트나 마야와 같은 고대문명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물론 인디아나 존스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를 수도 있다. 이러한 이미지가 아마도 고고학이라는 분야에 가지고 있는 일종의 환상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대중적으로 유명하지는 않은 무수히 많은 고고학 분야가 있다. 그 중에서도 구석기시대 고고학은 생각보다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전곡리 유적에서 발견된 주먹도끼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잘은 모르지만 국사교과서 가장 첫 부분에 등장하는 시기 정도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비교적 잘 기억하는 초기 국가의 형태가 만들어지는 역사시대 이전을 우리는 선사시대라고 부르는데, 보통은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와 같은 표현이 익숙할 것 같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일본에도 구석기시대가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곳 일본에서는 구석기시대, 죠몽시대, 야요이시대, 고분시대와 같이 문화적인 개념으로 시대명을 지어서 부르고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구석기시대만이 우리와 똑같은 구석기시대라는 표현을 쓴다. 심지어 구석기시대라고 부르기 이전에는 선토기시대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물론 구석기시대를 문화적 개념으로 명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만큼 이곳 일본에서도 구석기시대는 인기가 적은 편이다. 단적으로, 각종 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작품들 속에서 오래된 선사시대를 빗대어 표현할 때에는 ‘구석기시대’라고 하지 않고 ‘죠몽시대’라고 한다. 모두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죠몽시대가 가장 오래된 시기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은근히 있을 정도이다. 어쩌면 죠몽시대부터가 일본으로서의 정체성이 느껴지는 시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잘 알다시피 신석기시대부터는 정착생활이 시작된다. 즉, 구석기인들은 수렵채집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이동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보니 신석기시대부터는 어딘가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문화라는 것을 만들고 고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확률이 높아지는데, 그에 비하면 구석기인들은 아무래도 어느 나라, 어느 지역으로 국한할 수 없는 비교적 자유로운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구석기시대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있어서 한일관계는 굉장히 민감한 부분이고, 또 역사문제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일본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즐겁게 구석기연구를 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구석기시대는 국경도 없고 나라와 민족이라는 개념에 얽매이지도 않고, 인간 그 자체에 집중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복잡한 생각과 의도들을 배제할 수 있게 해준다. 어떤 면에서는 연구자가 가장 순수해질 수 있는 연구 분야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한국의 구석기도 일본의 구석기도 아닌, 동아시아지역과 세계를 누비던 구석기 사람들의 모습을 연구하는 이 시간들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