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음알음, 전곡패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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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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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제29회 축제장에서의 전곡패밀리
이한용 (전곡선사박물관 관장)
지금으로부터 31년 전 인 1993년 약 200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주먹도끼 만들고, 석기로 돼지 삼겹살도 썰어보는 소박한 구석기체험 행사로 시작했던 전곡리구석기문화제가 오늘날 수십 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구석기문화를 즐기고 배우는 연천 구석기축제로 성장했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멩이 하나가 지역 발전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 되었다는 오해가 많았습니다. 그 편견을 넘어 전곡리 유적을 보존하고 활용하기 위한 고난의 시간을 견뎌내며 연천 구석기축제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참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문화재 보존과 활용의 세계적인 모범사례 손꼽히며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세계적인 구석기문화 축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연천 구석기축제에는 많은 주인공들이 있습니다만 그중에 꼭 기억해야 할 숨은(?) 주인공들이 바로 전곡패밀리입니다. 전곡패밀리는 연천 구석기축제의 대표프로그램인 <세계체험마을>에 참여하는 외국 전문가들이 스스로 자랑스럽게 이름 붙인 커뮤니티입니다. 구석기축제를 맞아 이 친구들을 꼭 소개하고 싶습니다.
연천 구석기축제가 한창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던 2000년 대 초반, 스페인의 유명한 선사유적인 아타푸에르카 유적을 방문한 배기동 초대 전곡선사박물관장(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한양대 명예교수)의 눈에 유적을 안내하던 한 청년이 눈에 띄었습니다. 청년 ‘쎄르다’는 가죽옷을 차려입고 나무를 비벼가며 불도 피우고, 석기도 뚝딱뚝딱 만들었습니다. 배관장님은 연천의 구석기축제에서도 이 진기한 선사체험교육을 소개하고 싶어 이 청년을 전곡에 초대했고 쎄르다는 어느새 10번 넘게 연천을 찾는 연천구석기축제의 단골 손님이 되었습니다. 쎄르다의 단짝 친구 ‘파니’, 포르투칼의 ‘뻬르도’, 탄자니아의 ‘레므라’, 칠레의 ‘레오폴’도 모두 쎄르다를 인연으로 연천에 오게 된 전곡패밀리들입니다.
이한용 관장과 레므라, 쎄르다, 파니
2009년 더운 여름날 저는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인근의 외찌도르프라는 곳에 있었습니다. 외찌도르프는 그 유명한 아이스맨 외찌를 주제로 만든 일종의 민속촌 같은 체험마을입니다. 전곡선사박물관에도 외찌와 관련된 전시를 계획하고 있던 터라 마을 이곳 저곳을 부지런히 조사하고 있던 저에게 한 남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숲속에서 웃통을 벗고 뭔가를 열심히 하던 이 친구는 선사시대 기술을 연구하는 실험고고학자 ‘토마스’였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제가 외찌를 공부하러 멀리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된 토마스는 말굽버섯, 부싯돌, 마그네슘 광석을 이용해 불을 피우는 일명 ‘외찌 불피우기’를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마그네슘 광석 알갱이가 잘 말린 말굽버섯 위에 흩뿌려지며 불이 피워지는 마술 같은 광경을 보며 감탄하자 토마스는 외찌 불피우기 도구를 그 자리에서 저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저는 “너는 꼭 한국 전곡에 와서 외찌 불피우기를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돼, 내가 너 초청할테니까 꼭 와라“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토마스는 이 말을 인사치레로 받아들이며 건성으로 ”한국 갈게“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후 저는 정말로 토마스를 초대했고 한달음에 달려온 토마스는 연천 구석기축제에서 멋진 불피우기 시연을 보여주었습니다. 안타깝게도 토마스는 몇 해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 그 빈자리는 저를 삼촌이라고 부르는 그의 아들 ‘사무엘’이 채우고 있습니다. 사무엘도 전곡패밀리의 일원이 되어 매년 축제장에서 열심히 불을 피우고 있습니다.
2019년 27회 축제에 모인 전곡패밀리
전곡패밀리의 빼놓을 수 없는 프랑스 멤버 ‘마리옹’이 전곡에 오게 된 사연도 극적입니다. 일찍부터 한국문화의 팬이었던 마리옹은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라디오를 즐겨 들었습니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전곡선사박물관을 다녀간 유명한 프랑스 선사고고학자 ‘이브 코팽’이 대담 프로그램에서 전곡선사박물관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때 마리옹은 번쩍 생각했습니다. ”바로 저기야! 내가 한국에서 찾아갈 곳은 전곡이야“. 마리옹은 당시 전곡선사박물관 학예팀장이었던 저에게 자기의 사연을 적은 이메일을 보냈고 결국 전곡선사박물관에서 인턴십을 밟게 됩니다. 프랑스로 돌아간 마리옹은 동굴벽화로 유명한 쇼베 동굴의 교육담당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여러 차례 연천 구석기축제를 찾아 동굴벽화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이제는 아기 엄마가 된 마리옹의 소원은 딸과 함께 구석기축제에 참여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마리옹을 따라 온 친구 프랑스인 '마티유'도 전곡패밀리로 빠질 수 없죠.
대만의 타이뻬이 시청 문화재 부서에 근무하는 ‘이네스’ 역시 전곡선사박물관에서 3개월동안 인턴을 하면서 전곡패밀리 멤버가 되었습니다. 대만의 십삼행박물관팀과 함께 전곡축제에 몇 차례 참여했던 이네스는 이제 대만의 한국 문화통으로 성장해서 전곡패밀리의 든든한 한 식구가 되었습니다. 일본 센다이 지하의 숲 박물관의 ‘사토’씨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전곡패밀리입니다. 축제 때마다 전곡에서 부지런히 돌을 깨며 덕을 쌓은 덕택인지 얼마 전에 대학교수가 되었답니다.
마티유, 울프 헤인 그리고 로버트
마지막으로 소개할 전곡패밀리는 바로 ‘울프 헤인’씨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실험고고학자인 울프씨는 한국에서 열리는 구석기 축제에 관한 얘기를 듣고 자기 발로 스스로 찾아와서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울프씨는 저의 친구인 이탈리아의 아이스맨 박물관의 요한나와 안젤리카를 따라서 연천 구석기축제장을 처음 방문했습니다. 상상초월 엄청난 스케일의 연천 구석기축제에 크게 감명받은 울프씨는 정식으로 ‘전곡패밀리’라는 이름을 제안했고 모두가 박수로 울프씨의 멋진 작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울프씨의 친구 ‘코니’와 제자뻘 되는 ‘로버트’도 울프씨를 따라 차례차례 전곡패밀리의 멤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울프씨가 전곡패밀리에 꼭 영입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추천해 결국 연천에 오게 된 전곡패밀리 멤버가 네덜란드의 에바입니다. 이제는 전곡패밀리의 맏언니로서 찐한 우정을 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쓰며 첫 인연들을 떠올려보니 새삼 전곡패밀리가 정말 대단하네요 ^^
전곡패밀리를 소개하다 보니 ‘알음알음’ 이란 단어가 떠오릅니다. 여러 사람을 통해서 서로 알게 된 사이를 ”알음알음“이라고 합니다. 알음알음 서로를 알게 된 전곡패밀리는 그래서 더욱 돈독하고 끈끈합니다. 이 전곡패밀리가 매년 손꼽아 기다리는 때가 바로 연천구석기축제입니다. 전곡패밀리의 연천사랑, 구석기사랑, 그리고 한국 사랑은 매년 풍성해지는 연천구석기축제의 밑거름이 아닐까 합니다. 사랑해요, 전곡패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