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풍속화에 담긴 고기먹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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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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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곡선사박물관 기획전 <고기> 속 '식사의 시작' 코너와 조선시대 육식문화
심경보 (전곡선사박물관 학예연구사)
저녁 회식문화가 많이 사라진 요즘엔 종종 회사동료들과 점심에 식당을 찾아 고기를 구워먹곤 한다. 평등한 동료문화 속에서도 고기먹는 일 만큼은 여전히 자리배치가 중요하다. 평소 친분을 바탕으로 고기 굽기 스킬이 출중한, 이른바 고기마스터의 참석 여부를 확인하고 재빠른 눈치로 그의 옆자리를 사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해당 테이블의 고기마스터가 노동의 수고에 지치지 않도록 끊임없이 그가 가진 고기에 대한 지식에 맞장구 치며 지금의 고기가 어제의 고기와 다름에 지속적인 감탄을 유지해야 한다. 이와 같은 고기먹기에 대한 노력이 더욱 발전하여 스스로를 고기마스터로 승급시킬 수 있다면 좋겠지만, 고기 굽기는 이미 예술의 영역과도 같아 노력 뿐 아니라 빠른 손과 눈이란 재능도 필요한 꽤나 어려운 일이다. 결국에 예나 지금이나 맛있는 고기 먹기는 쉽지 않다.
고기는 평화로운 음식이다. 부쩍 기운이 부족함을 느끼는 장년층부터 수많은 불가지론을 앞세운 편식러에 이르기까지, 고기는 식탁 위 푸르른 기운들 사이에서 풍요로운 산미와 육즙으로 중화하여 모든 이를 평등한 행복에 빠져들게 한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런한 평등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을까?
조선시대의 가장 유명한 고기러버는 바로 위대한 세종대왕이다. 세종대왕은 천재들이 지녔던 까탈스러운 취향을 오롯이 식탁 위에서만 피워냈기에 그 후덕한 인덕으로 위대한 업적만큼이나 위대(胃大)한 분이었다.
"주상(세종)이 어려서부터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하였다." (세종실록 2년 8월 29일)
"(세종이) 초상을 당하여 간소하게 식사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내가 어찌 애처로워하지 않겠는가." (세종실록 2년 8월 29일)
이와 같은 세종대왕의 기록은 왕에서 민중까지, 조선 500년간 이어질 고기사랑의 시작을 보여준다.
오랜 시간을 흘러 근대기 역사학자인 최남선은 1937년에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每日新報)』에 기고했 글을 바탕으로 광복 이후에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동명사, 1946)이란 책을 출간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고구려의 고기요리로 알려진 '맥적(貊炙)'을 현대 불고기 문화의 연원이자 한민족 육류음식의 원류로 보았다. 최남선의 주장은 후대 역사학자들과 식문화연구자들에 의해 오류가 많았음이 밝혀졌지만, 그가 살던 1930년대에 평양 인근 소나무 숲 마다 상춘객의 고기굽는 연기로 가득했다는 신문기사들은 '炙, 구울 적'으로 대표되는 고기를 굽는 문화가 민중에게 일상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시대의 고기문화를 담은 작품을 살펴보자.
성협(成夾), 〈고기굽기-야연〉, 《성협 풍속화첩》, 조선후기, 종이에 담채, 33.2×33.4㎝, 본관511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뮤지엄)
이 작품은 19세기에 활동한 성협(成夾)이 그린 〈고기굽기-야연〉이란 작품이다. 비록 19세기는 조선 민중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던 풍속화의 황혼기였지만, 이 작품은 생생한 장면과 세부적인 묘사로 조선 후기 음식문화를 다룰 때 항상 언급되고 있다. 좀 더 작품을 들여보면 큰 나무 아래에서 가운데가 오목한 불판을 화로에 올려 수북히 쌓은 고기를 술과 함께 먹는 인물들의 모습이 정겹다. 두터운 옷과 털달린 모자를 통해서 그림 속 계절이 겨울임을 알 수 있다. 아무리 화로가 있다고 해도 추운 겨울날에 야외에서 고기를 먹는 모습이 낯설기도 하지만, 1925년에 발행된 '해동죽지(海東竹枝)'에는 조선시대 개성지방에서 먹던 눈을 이용한 고기 요리인 '설리적(雪裏炙)' 소개 되어 있어 한 겨울의 야외 바베큐가 오랜 전통임을 알 수 있다. 작품 화면의 중간에는 제시가 있어 그림의 내용을 알려준다.
술잔과 젓가락 늘어놓고 온 동네 사람과 모인 자리 (杯箸錯陳集四隣)
버섯과 고기가 정말 맛나네 (香蘑肉膊上頭珍)
늘그막의 식탐이 이쯤에서 다 풀리겠냐만 (老饞於此何由解)
푸줏간 앞에서 입맛만 다시는 사람 꼴은 되지 말아야지 (不效屠門對嚼人)
그림 속 인물들은 사대부들이 쓰던 갓과 복건을 비롯하여 중인들이 즐겨쓰던 탕건을 쓴 인물이 섞여 있어 다양한 계층인 함께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이 그려진 19세기 이후 조선 사회는 사대부와 사회적으로 성공한 중인들이 함께 문화를 교류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흰 모자를 쓴 인물로, 삼년상을 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학의 경전에서는 삼년상을 치르는 상주는 고기를 먹지않고 정갈함을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상주가 오랜 기간 상을 치르면서 건강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현실적으로 고기를 먹기도 하였다. 세종 역시 상을 치를 기간 고기를 먹도록 태종이 특별히 언급하기도 하였고, 퇴계 이황은 자신의 제자가 상중에 고기를 먹던 이를 나무라자 오히려 상주가 건강을 해치는 것이 더 큰 불효라 하여 제자를 혼낸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결국 조선 후기의 삼년상을 치르는 상주에게는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존재하였다.
조선 후기의 고기 문화를 보여주는 또 다른 작품도 전해진다.
작가미상, 〈야연(野宴)〉, 조선후기, 종이에 담채, 76×39㎝, 본관803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뮤지엄)
이 작품 역시 19세기의 조선사회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풍속화 작품이다. 이 작품 속에서도 털모자와 옷을 통해 역시 겨울임을 알 수 있으며, 동일한 오목한 불판과 화로를 쓰고 있다. 이 오목한 화로는 '전립투(氈笠套)'로 조선시대 병졸의 투구를 본 뜬 구이와 전골을 위한 무쇠로 된 그릇이다. 모자를 뒤집어 챙 부위에 양념한 고기를 굽고, 고기의 양념과 육즙이 모자 안으로 흘러 육수와 함께 끓으면 버섯과 야채를 넣어 전골로 먹던 방식이다. 그 모습이 현대의 샤브샤브와도 비슷하다.
KBS 한국인의 밥상, 2021.02.01 (필자 화면 갈무리)
그림 속에서는 사대부에서 중인, 그리고 기생까지 한 자리에 어울려 고기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엄격한 신분제적 사회질서를 유지한 조선시대에 고기를 먹을 때 누가 구었을까? 물론 대부분의 음식준비와 요리는 전립투를 비롯한 무거운 살림도구를 야외로 지고온 행랑아범과 각종 식재료와 찬거리를 이고온 찬방어멈의 몫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림에 보이는 전립투를 둘러싸고 전투적으로 고기를 먹어치우는 이들 주위엔 행랑아범과 찬방어멈의 자리는 없어보인다. 오히려 저마다 손에든 접시 위에 저마다 할당된 수북히 쌓인 고기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현대 미국의 포트럭파티(potluck party)를 연상시키지만, 조선시대에는 현재와 같은 단체 식탁이 아닌 독상으로 음식을 제공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마다 들고 있는 고기접시가 그리 낯설지는 않다.
이처럼 조선시대 풍속화 속 장면은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현재 전곡선사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기획전 '고기'에서는 선사시대에서 현대까지 복합적인 고기 먹는 문화 양상을 담고 있다. 고기를 사랑한다면 한번 쯤 들려 그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